<열정과 냉정 사이>
리듬엔블루스(R&B)가수이자 그래미상을 3회나 수상한 27세의 미국 흑인여가수 엘리샤 키스. 매력적인 용모와 아름다운 몸매, 숨이 멎을 듯 폭발적인 가창력과 현란한 피아노 연주솜씨로 2천여 평의 잠실체육관을 빈틈없이 채운 관객들을 쉴 새 없이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이에 반응하는 청중들의 고막이 찢어질 듯한 함성으로 6미터 높이의 체육관 지붕이 다 들썩이는 듯 했다.
이날의 공연관람을 주선한 K를 위시해서 나와 S, Y는 젊은 관객들의 터질듯한 열정에 전염되어 박수치고 환호하며 공연장의 열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신나는 음악에 흥이 오른 S는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면서 내 귀에다 대고 소리쳤다. “이런 공연은 남편이랑 같이 가면 절대 안돼.” 의아해하는 내게 또 소리를 지른다. “팔짱끼고 가만히 앉아 있는 걸 보면 속 터진다니까.” 그녀의 얘기에 전적으로 공감 하면서 ‘시체지수’란 단어를 떠올렸다.
시체지수, CQ(Corpse Quotient). 좀 섬뜩한 표현이긴 하지만 꽤 적절한 말이다.
IQ(Intelligence Quotient)나 EQ(Emotional Quotient)는 높은 점수를 받을수록 호감을 주지만 CQ는 반대다. 이 지수가 높은 사람들은 남의 일에 무관심하며, 무감동하고, 웃는 것에 인색한 비호감적인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하는 축구경기장에서 수만의 관객이 만들어낸 파도타기 장관을 썰렁하게 토막내버리는 주인공들이 바로 CQ100인 사람들이며, 넥타이를 맨 점잖은 중년남자일수록 이것이 높을 가능성이 많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쉽게 냉소주의자가 되고 방관자가 된다. 대기업부품 같은 삶의 질서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도록 학습되어 더 이상 의문도 품지 않고 질문도 하지 않을 뿐더러 구르는 낙엽을 보고 까르르 웃는 일은 더욱 없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몸이 살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빌자면 우리는 모두 한때는 재미있는 도둑이던 시절이 있어서 호기심과 열정, 장난기로 흥미롭게 살았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정해놓은 규정 속에 나를 집어넣고 못질해 버린, 답답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철없던 때 나의 CQ는 마이너스점수가 아니었을까 여길 정도로 천방지축이어서 언니는 종종 내가 자기 동생이란게 창피하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얌전하단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것이 원래 내 성정인양 살아오고 있다. 누가 그리하라고 시키지도 않았건만 어느 틈엔가 점잖음을 가장하고 눌러 앉힌 가증스러운 무게. 스스로 떠안은 돌덩이들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활기차게 사는 것은 더욱 좋다. 함께 힘차게 사는 것은 최고로 좋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다가 발견한 문장이 내게 용기를 준다.
“삶은 실험이다. 많은 실험을 할수록 좋다” R ․ W 에머슨의 얘기는 더욱 더 용기백배이다. 이제 공연장엘 가면 목청이 터져라 환호하며 두 팔을 머리 위로 높이 들고 흔들면서 그때, 그곳의 분위기를 만끽하리라. 그러면 내 CQ지수도 제로를 향해 곤두박질치겠지. 재미있는 도둑의 시절로 돌아가는 상상만으로도 짜릿하고 통쾌하다.
이제 더 이상 로얄석보다 비싼 스탠딩 티켓을 사서 공연 내내 좌석도 없는 무대 앞에 서서 온 몸을 흔드는 젊은이들을 한심하게 바라보지 않으리라.
그 날, 엘리샤 키스의 화려한 몸짓을 따라 우리들 중 가장 신나게, 온 몸으로 공연을 즐긴 K. ‘바람’이란 별명답게 바람을 잘 잡는 그녀가 공연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잠실체육관의 거대한 지붕을 신산스레 올려다 보며 한마디 했다.
“아, 우리나라 말로 된 조용한 노래 듣고 싶다.”
주춤 주춤 내려가던 CQ가 초고속으로 상승하는 소리가 들렸다.
2008년 《북새통》11월호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