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시절의 어느 여름 날, 사이프러스나무에 관한 시를 읽은 후 작가의 이름이나 내용은 다 잊었어도 ‘사이프러스’란 단어만은 세월과 무관하게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었고 내 삶 속에서 시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마치 전혜린의 수필을 읽고 슈바빙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본 적도 없는 그 나무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가지게 되었다.
남편을 따라 시작한 사우디에서의 생활이 4년이 넘게 되자 어지간히 타성에 젖은데다 연일 40도를 웃도는 사막의 열기에 녹초가 되어 있을 무렵이었다. 머릿속이 텅 빈 듯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무기력함으로 하루하루가 힘들던 당시, 평소 교분이 별로 없던 교민 한 사람이 키프러스(사이프러스)에 다녀왔다는 말을 했을 때 마치 내 생활 속의 청량감의 정체가 ‘사이프러스’인 것처럼 그곳에 가기만 하면 무중력 상태에서 흐느적거리던 내 삶이 어떤 식으로든 모양새를 갖출 것 같았다. 단지 사이프러스란 단어 하나만으로 늘 지니고 있던 화두 하나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사우디를 떠나 세 시간 반 만에 도착한 키프러스 라르나카 공항은 부자유스러운 중동을 떠나 자유를 만끽하려는 아랍인들로 흡사 엑소더스를 연상케 했다. 우리나라 시골 역 같은 조잡한 공항이었으나 많은 관광객들로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데만도 거의 세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간이의자에 앉아 있는데 성장을 한 화려한 아랍여인이 다가오더니 자기 아기를 잠시 봐 달라했다. 그러마 하고 받아든 아기의 커다란 눈망울이 어찌나 예쁘던지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는데, 차례가 다 되어 오는데 남의 아이를 맡았다며 성질 급한 남편은 역정을 냈다. 줄은 점점 짧아져 가는데 아기 엄마는 나타날 기미가 없어, 이러다 팔자에 없는 아랍 아이를 키우게 되는 건 아니지 은근히 불안해졌다. 내 차례가 거의 다 되어서야 그녀는 태연히 나타나 “슈크란(탱큐)” 하고는 아기를 안고 사라졌다. 아마도 이곳을 자주 와 봐서 심사가 그리 빨리 진행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공항에서 수도 니코시아 시내로 들어가는 한 시간 동안 사이프러스의 행렬을 기대했으나 그 대신 무성한 올리브나무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식생이 귀한 중동지역을 떠나 푸른 나무숲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 사이프러스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탓인지 중근동 지방임에도 구하고 서구적인 요소가 더 강했다.
아리아드네호텔로 숙소를 정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그리스의 영향을 특히 많아 받은 듯 곳곳에 신화 본떠서 만든 조형물과 기념품들, 지명, 상호들로 여행자들에게 신화적 상상력을 충분히 제공해주고 있다.
아프로디테가 거품 속에서 태어났다는 네아파포스 해안은 아련한 빛 속에 진주알이 부서지는 듯 눈부셨다. 푸르디푸른 지중해는 이방인의 가슴을 짙은 남색으로 물들이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내 시야에 머물다 가곤 한다. 오셀로가 애처 데스데모나를 죽인 곳으로 전해지는 파마구스타 성채는 비극의 현장임을 알려주는 어떤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너무 파래서 서글픈 바다가 지중해의 슬픈 전설을 전해 줄 뿐이었다.
일탈을 꿈꾸는 아랍인들로 인해 해변은 서구의 여느 바닷가 못지않게 화려하고 자유분방했다. 과감한 노출과 노골적인 애정 표현, 음주 등을 즐기는 그들을 보며 그동안 히잡(hijab)과 아라비안 로브에 가려진 억제된 욕망의 분출이 어디까지일까 궁금했다.
사이프러스나무는 키프러스 섬에서 숭배하던 것으로 섬의 이름에서 나무의 명칭이 유래되었다. 십자가를 만들던 성스러운 목재로 알려져 있으나 그리스나 로마에선 주로 묘지에 심던 나무였다.
수온이 적당히 기분 좋은 지중해 바다에 몸을 누이고 어디쯤엔가 있었을 사이프러스나무를 짐작해 보았다. 현지인 누구에게 물어도 명쾌한 답을 주진 못했는데, 아마도 내 영어발음이 시원찮았거나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이프러스나무의 잎과 열매에서 나오는 정유는 진정효과에다 머리를 맑게 하며 심리적 장애를 제거하는데 효과가 있다하니 나뭇잎조차 움직이지 않는 여름 한낮에는 사이프러스 그늘 아래라면 더위와 근심을 한 번에 날려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시를 읽은 지도, 사이프러스에 다녀온 지도 십수 년이 지났지만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사이프러스는 색이 바래버린 오래된 상념에 덧칠하듯 그렇게 다가왔다.
2006년《에세이플러스》8월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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