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서양미술 400년>전은 프랑스 유명 미술관들이 소장하고 있는 거장들의 작품전이어서 남편과 함께 전시장을 찾았다.
‘푸생에서 마티스까지’란 부제가 붙은 이번 전시는 서양미술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예술가들이 창작을 위해 고심한 흔적의 산물을 보여 주는 뜻 깊은 행사라는 광고문구가 구미를 당겼다.
‘가난한 것은 봐 줄 수 있어도 아름답지 못한 것은 못 참는다’는 프랑스의 자존심이 이번 전시에서 나를 얼마나 자극할 지 기대가 컸다.
17세기 바로크시대 미술을 시작으로 전시된 작품을 가까이서 봤다가 멀리서도 보며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내 뒤를 따라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던 남편이 어느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채 한참을 머물러 있다. 19세기 신고전주의 화가 라파엘 콜랭이 그린 <청춘>이었다.
연녹색 나뭇잎이 무성한 숲을 배경으로 한 소녀가 덜 여문 가슴을 드러낸 채 왼손으로 이마에 비친 햇살을 살짝 가리고 있다. 푸른 눈과 부드러운 웨이브의 금발머리 소녀는 수동적이며 그리움을 상징하는 하늘색 옷을 오른 쪽 어깨에서 허리로 흘러내리도록 걸친 채 가만히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시선이 나와 마주 하고 있다. 웃을 듯 말 듯 악간 열린 입술이 오른 손에 보일 듯 말듯 쥐어진 가느다란 하얀 꽃과 닮아 있다.
<청춘>앞에 선 남편의 옆모습엔 날렵하던 꽃미남 청년은 간데없고 잃어버린 청춘을 찾으려는 듯 그림을 응시하고 있는, 군데군데 빛나는 은발을 머리에 얹은 중년남자만이 보일 뿐이다. 그림을 바라보는 눈길이 하도 그윽해서 혹시 몰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옛 애인이라도 회상을 하는 건지 슬그머니 질투가 난다. 다가가 넌지시 물어 보았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돌아보는 눈 속엔 벅찬 감동이 가득하다. “야! 연녹색이 참 상큼하다. 풋풋한 젊은 기운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고 …”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감명을 받았나? 다시 그림을 보니 그새 질투에 눈이 흐려졌는지, 싱싱하던 젊음이 약간은 피곤해보이고 또 성장이 덜된 젖가슴은 풍만한 여인의 그것처럼 고혹적이지도 못하다.
녹색은 완벽한 중립으로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며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초록색 나뭇잎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생명력이 느껴지는 건강한 이미지와 소녀가 입고 있는, 편안하면서도 긴장을 완화시켜주며 전통적으로 여성의 원칙을 상징하는 파란색 옷과의 조화가 주는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음인가. 점성술에서 녹색은 천칭(天秤)자리에 속한다. 남편의 별자리도 바로 그것이다. 그림에 반할만한 모든 조건이 딱 맞아떨어졌다.
남편을 만난 이래로 그가 나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에 없다. 그의 탓만을 아닐게다. 어쩌면 그는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보내버린 자신의 청춘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지.
일찌감치 짊어진 장남이란 짐의 무게 때문에 오금을 펴지 못한 감성의 씨앗이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 발아하려고 꿈틀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감성의 싹을 틔워주는 것은 나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가장 비싼 보석중의 하나가 녹색 에메랄드이다. 어쩌면 내 남편은 내면 깊숙한 곳에 찬란한 에메랄드 하나쯤 감춰두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위대한 성악가 파바로티도 그의 아내에 의해 소질이 발견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종국에 가서는 외도를 하여 아내를 배신하긴 했지만.
4․ 5년 전이던가, 색소폰을 연주해 보는 것이 소원이라던 조심스럽고도 쑥스러운 듯한 남편의 말에 거금을 들여 악기를 산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단순히 멋드러진 연주솜씨를 흉내 내려는 욕심이 더 많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진정으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채 그 느낌을 즐기는 듯했다.
그 날 나는 농담이 서툴고 분위기도 즐길 줄 모르는 목석같은 남자라고 치부해온 남편에게서 아름다운 남성을 발견했고 내게서도 새삼스레 청춘이 되살아나는 듯한 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전시장을 돌아 나오는 길엔 좀 전에 느꼈던 감동을 놓치지 않으려 팔짱을 꼭 낀 채 천천히 걸었다. 겨울 햇살이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윤기가 없고 까칠하지만 그 날 미술관 앞마당에 내리는 햇살은 내 마음이 그러하듯 진주빛으로 부드러웠다. 주위의 모든 것이 청춘이거나 혹은 희망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나중에 들은 고백이지만 남편은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처음 만났을 때의 나를 떠올렸다고 했다.
웰빙 중의 으뜸은 명화감상이라 하던가.
2005년 《책과 인생》5월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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