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적으로 약을 챙겨 식탁에 올려놓고 어머님을 모시러 방으로 간다. 방이 비어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가 ‘참, 병원에 계시지’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오후 4시면 내 휴대폰에서는 ‘제주도의 푸른 밤’ 이란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복지관 다녀오시는 어머님을 모시러 갈 시간이다. 어딜 갔다가도 4시만 되면 집에 와야 하기에 아침마다 가족들은 가위 바위 보로 당번을 정했다.
일주일이면 닷새,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대하는 복지사이지만 어머님은 그에게 늘 같은 인사를 하신다. “우리 며느리요, 참 이쁘지요.”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암담한 상황을 벗어나 제주도에나 가 있었으면 했다. 이제 제주도 따위는 잊어버려도 좋으련만 아직도 그 노래가 흘러나오면 반사적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딸이 없으셨던 어머님은 어디를 가든 나와 함께 다니기를 좋아하셨다. 또 친구들을 종종 집으로 청해서 당신의 참한 큰며느리 역할을 충실히 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며 “우리 며느리요, 이쁘지요”라고 자랑하기를 즐기셨다.
한때는 큰며느리란 배역이 부담스러웠고 고부간의 적당한 간격이 절실했다. 친정엄마가 내게 그러했듯이 내 영역이 침범당하지 않을만한 그런 사이이기를 원했지만 시어머니는 친정엄마보다도 더 살뜰하게 챙겨주고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으며 함께하기를 원했다.
나는 시어머니와 살면서 줄곧 내가 밑지는 장사를 한다고 생각해왔다. 이렇다 할 재산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명품 옷이나 핸드백 따위를 받은 적도 없거니와 해마다 미국에 있는 동생 집을 방문 할 때의 여행 경비며 친척들에게 줄 선물보따리 챙기기 등 치다꺼리를 해왔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게다가 지난 8년간은 어땠는가, 치매판정을 받은 후로 노심초사하며 지내온 시간들을 생각하면 밑져도 보통 밑지는 장사가 아니지 않는가.
모든 스케줄은 어머님 위주로 짜인 지 오래고 온 가족이 어머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번갈아가며 당번을 서야하는 상황에선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아닌 이상 심통을 부리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겼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그렇게 좌충우돌, 애면글면하면서 지내다가 어머님이 입원하신 후엔 만사가 내 뜻대로 돌아갈 것 같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나사 하나가 빠져 제대로 작동 되지 않는 장난감처럼 삐거덕거리며 집안에서 어머님의 흔적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어머님이 집안에서 갈 바를 모르고 서성일 때면 내가 늘 하던 말 “뭐 찾으세요?”라는 얘기를 이제 아이들이 내게 하고 있다.
따져보니 친정엄마와 산 시간들과 시어머님과 지낸 시간은 양과 질에 있어 차이가 많이 난다. 사업가로 활동하던 엄마와는 어릴 때부터 떨어져 지냈기에 듬성듬성한 시간들을 꼭꼭 눌러 채워보면 10년 정도로 계산이 되고 시어머니와는 25년의 결혼생활 중 해외지사 생활 5년을 뺀 20년간을 착실하게 같이 살았으니 이제 와서 내가 친정엄마보다는 시어머니와 더 많이 닮았다 한들 이의가 없다.
맨발로 뛰어나가 맞이하던 아들, 손자들을 보고 생면부지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신다. 가족들이 애가 타서 ‘내가 누구냐’고 물어볼라치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신다. 연세가 몇이냐고 물어보면 또 나를 쳐다보신다. 점심 때 뭘 드셨냐고 물어 봐도 역시 내 얼굴을 보며 답을 가르쳐주기를 기다린다. 그리고는 질문에 상관없는 똑 같은 대답을 하신다. “우리 큰며느리요, 참 이쁘지요.”
망각의 강을 건너면서 유일하게 지니고 간 것이 아마도 큰며느리에 대한 기억보따리 인가보다.
다시 계산을 해 보니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뉘라서 나를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예쁘다고 말해줄까. 감자를 좋아하는 아들보다 고구마를 좋아하는 며느리가 우선인 시어머니, “니가 만든 빵이 제일 맛있다”며 제과점 빵을 무시하는 어머니. 당신 옷을 과감하게 잘라서 내 원피스를 만들어 주고는 흡족해 하고, 까탈스런 며느리를 위해 이불에 풀을 먹여 주시던 어머니께 오히려 내가 빚을 지고 있다.
빚지고는 못사는데, 빚을 못다 갚을까봐 마음이 초조해진다.
2008년 《에세이플러스》3월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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