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지 못할 것을 이루리라
춤추는 마에스트로, 함신익을 만나다
지휘봉을 든 혁명가, 오케스트라 부흥사, 세계음악계의 엔도르핀, 마에스트로CEO…
지휘자 함신익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음악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무대 위에서 단원들과 왈츠를 추는가하면 클래식의 저변확대를 위해 축구복을 입고 지휘를 하고, 연주하는 도중에 슬며시 무대 뒤로 사라졌다가 와인을 쟁반에 받쳐 들고 나와 악장에게 대접하는 등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모습을 연출하여 얻게 된 별명들이다.
그가 대전시향의 상임지휘자로 있을 때나 KBS교향악단을 객원지휘 할 때면 어떤 참신한 연주를 들려줄까 하는 기대감으로 종종 연주 무대를 찾곤 했는데, 자서전격인《예일대 명물교수 함토벤》을 출간하여 이참에 함신익을 깊이 들여다보기로 했다.
단돈 200달러를 들고 미국 땅을 밟은 지 10여년 만에 예일대교수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 지휘자 함신익. 그의 별명만큼이나 성공스토리도 별난 것인지 궁금했다.
나는 나는 될 터이다. 음악가가 될 터이다.
삼각산 아래 삼양동 달동네를 놀이터 삼아 어린 시절을 보낸 함신익은 탁아소에 다닐 때, 사람들 앞에선 “나는 나는 될터이다. 목사님이 될 터이다”라고 노래를 부르고 돌아서선 “음악가가 될 터이다“라고 가사를 바꿔 불렀다고 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음악을 하기엔 열악했다.
개척교회 목사였던 아버지가 꾸려가는 살림은 넉넉지 않아 제대로 된 피아노 레슨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교회에서 성가반주를 하는 막내아들의 모습을 보고자 했던 어머니의 소박한 소망이 어린 함신익에겐 장차 마에스트로 자리에 오르게 될 초석이 되었다.
주일마다 아버지 교회에 나가 성가반주를 하고 비록 수준이 낮은 동네레슨이긴 하지만 피아노를 배울 때면 그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왕이 되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힘든 사춘기를 지탱해준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음악으로 장래를 결정. 건국대학교 음악과에 입학을 하지만 더 이상의 진전이 없던 그의 음악생활은 우연한 기회에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교회합창단의 지휘를 맡으면서 ‘지휘는 내 운명이다’라고 느꼈다고 했다.
‘다락방의 베토벤’에서 ‘함토벤’으로
2003년도에 지은《다락방의 베토벤》은 교만하게 썼다고 함신익은 고백했다. 감추고 싶은 것이 많았기에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점이 부끄러워 자청해서 개정판을 내기로 하고 진솔하게 쓰려 노력했고,《함토벤》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세상에 나왔다. 이제 홀가분하다고 그는 말하지만 아직도 그에게는 잘난 것이 못난 것보다 훨씬 더 많아 보인다.
왜 함토벤인가? 광운중학교에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학생들에게 함토벤이라 자기소개를 했는데 당번학생이 학급일지의 담당교사란에 이를 그대로 적어놓아 교감선생님이 진짜 이름이냐고 물어 보았다. 음악가로서 베토벤의 뒤를 잇고 싶은 열망을 가졌기에 함토벤이라 불리우고 싶다고 대답했다. 자나 깨나 음악을 생각하는 그의 일면을 보는 듯하다.
곱슬거리는 파마머리와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매가 베토벤을 연상시킨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각고 끝에 이루어낸 그의 입지전적인 성공스토리는 청소년들에게 용기를, 가난한 음악도에겐 희망을, 실의에 빠진 이들에겐 동기를 부여해주기에 충분하다.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라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 한 달 치 기숙사비 200달러만을 들고 도미. 라이스음악대학을 거쳐 이스트만 음악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 전 과정 장학생으로 수업료 한 푼 내지 않고 학업을 마침. 1991년 폴란드 피텔버그 국제지휘대회 입상하면서 프로 지휘자로 활동 시작. 1995년 1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한국인 최초로 예일대 교수로 임명. 년 중 5개월가량은 세계 각국의 오케스트라 지휘를 위한 여행. 현재까지 전 세계 약 100여개의 악단을 지휘.
평범한 사람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그는 ‘이루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이뤄 내는 것, 삶이란 바로 그런 과정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스트라빈스키, 말러 등 평소에 접하기 힘든 곡을 청중에게 들려주기를 좋아하는 그의 도전적인 성향을 볼 때 현상유지란 지루한 단어임에 틀림이 없다.
1년의 절반가량은 비행기를 내 집 삼아 세계를 다니는 동안 가장의 빈자리를 가족들은 어떻게 메울까? 그는 이따금 집을 비우는 것은 오히려 가족들에게 휴식을 주는 거라며 은근슬쩍 합리화 시킨다. 함신익이 마에스트로의 자리에 이를 때까지 헌신적인 뒷받침을 해준 부인과 외동 딸 멜로디는 아빠의 의견에 동의해줄까.
대학시절 그의 별명은 ‘함또라이’였다. 검게 물들인 군복에다 하얀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가 하면 아버지양복을 줄여 만든 당꼬바지로 멋을 부리고, 종종 기다란 검정우산을 옆에 끼고 명상하듯 천천히 걸어 다니곤 했다. 음악 감상시간이면 함신익은 눈을 지긋이 감고 마치 수백 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지휘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동기생들은 회상한다.
‘음악계의 찬물’은 돌출행동을 일삼고 화제를 몰고 다니는 그에게 붙은 또 하나의 별명이다. 안이한 한국음악계에 찬물을 끼얹는 그의 말들은 음악계뿐만 아니라 교육계에도 타산지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학벌위주의 사회가 그에게 준 상처는 쉬 아물지 않는 모양이다.
1등만 알아주지 말고 2, 3등도 사랑해주어야 한다고, 꼴지들을 1등답게 만드는 것, 이것이 진정한 교육이라 일갈한다. 아마추어라 할지라도 프로대우를 해주면 프로답게 된다는 것이 함신익의 지론이다.
명물교수의 명품인생
함신익의 연주회가 끝난 음악회장 로비에는 언제나 그를 가까이에서 보고자 무작정 기다리는 많은 열성팬들을 볼 수 있다. 얼마 전 특강을 했던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그의 책 《함토벤》을 들고 사인을 받으려고 몰려든 여고생들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행렬은 그의 인기가 대중가수 ‘비’나 ‘동방신기’ 못지않은 것처럼 보였다.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고 팬들과 즐거이 악수하고 담소를 나누는 소탈한 모습에서 세계적인 지휘자의 면모를 찾기란 어려웠다. 다만 뾰족한 코와 빛나는 눈동자, 가느다란 손가락에서 치열하고 치밀한 마에스트로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는 힘겹던 시절을 이겨낼 수 있도록 자신에게 힘과 용기와 사랑을 주었던 많은 사람들에게서 받은 은혜를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 할 때라고 말한다. 그 신념으로 지난 6월 30일 몽골음악선교여행을 실행에 옮겼다. 몽골심포니로선 창단 이래 최초로 외국인지휘자를 맞이했고 함신익으로선 그토록 낡은 악기와 실력이 부족한 단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접하긴 처음이라 했다. 하지만 몽골단원들의 열정과 진심이 담긴 연주를 지휘하던 그는 매순간이 감동이고 눈물이었다고 회상했다. 보수를 받기는커녕 경비일체를 자신이 부담하여 감행한 연주였지만 오히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감명을 받았으며 또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언제든지, 기꺼이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 그는 진정으로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는, 뼛속 깊이 거장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마에스트로 함신익이 진정한 명물교수로, 아름다운 명품지휘자로서 우리 곁에 오랫동안 머물기를 소망한다.
2008년 《에세이플러스》11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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