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산음료를 즐기는 아들에게 달콤하고 시원한 사과주스를 만들어 주고, 이따금 변비로 애를 먹는 어머님을 위해선 오이즙을 짜 주며, 감자즙으로 남편의 쓰린 속을 달래주기도 하다가 거울 앞을 사수하는 딸들에게 당근즙을 선사하여 예뻐진 듯 기분 좋은 착각을 주던 착한 주스기가 떠날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한국산 주스기의 성능이 그다지 미덥지 못하던 시절에 구입하여 사용한 지 20여 년. 나와 함께 부엌을 지키며 알뜰한 주부인양 생색내게 해 주던 프랑스제 물리넥스 주스기는 요즘 들어 이제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그만 부려먹으라고 항변이라도 하는 듯 힘없이 쪼르르 즙을 흘려보내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
살살 달래보고 톡톡 치기도 하면서 기진맥진할 때까지 쥐어짰더니 아이들이 “엄마, 오래된 건 그만 버리고 새 걸로 사지요?”한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왜 심통이 나는지, 나를 내다버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공연히 심사가 뒤틀려 애꿎은 주스기를 탁! 하고 때렸더니 얘도 화가 났는지 갑자기 윙하는 굉음을 내며 주르르 즙이 흘러나온다.
마지막까지 꺼이꺼이 입으로 푸른 즙을 토해내다가 투두둑! 하는 소리를 끝으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이 기계가 새것일 때는 뭐든지 넣기만 하면 시원스레 남김없이 짜 주더니 오래될수록 즙으로 나오는 것보다 찌꺼기로 버려지는 양이 더 많아 실효성이 떨어졌다. 잘난 척, 아는 척을 하고 싶지만 알량한 밑천이 금방 드러나는 나와 처지가 비슷한 듯하여 안쓰럽다.
연륜이 대접을 받기는커녕 퇴물취급을 당하는 게 다반사인 요즘 세상, 이제 이 물건을 영원히 보내야 하나 아니면 좀 더 같이 살자고 해야 하나.
얼마 전 혹독한 이별을 경험한 나로서는 비록 낡은 기계일지라도 헤어지고 싶지 않다. 힘들어도 조금만 더 함께 있자고 달래면서 깨끗이 닦아 수리하러 갈 채비를 한다.
2008년 《한국수필》6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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