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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어려운 숙제

<사라진 해운대>

 

 100만 여명의 인파와 원색의 비치파라솔이 빼곡히 들어찬 해운대 바닷가. 피서객들은 모래밭과 바다에서 더위를 식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한편 재난방재청에선 한반도의 지진해일 발생 가능성을 제기하며 피서객들의 대피를 주장하는 지질학자 김휘 박사 때문에 옥신각신 하고 있다.

 주인공 연희(하지원 분)는 원양어선을 타고 나간 아버지가 사고로 죽자 생계를 위해 무허가 횟집을 운영하며 억척스레 사는 부산 처녀이고 그런 연희를 좋아하는 상가번영회장 최만식(설경구 분)은 자기가 연희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쉽사리 좋아한다는 말을 못하고 망설인다. 재래시장을 없애고 최신식 복합타운을 만들려는 구청장 최억조는 최만식의 작은 아버지로 상가를 지키려는 조카 만식과 갈등하고 약자인 만식은 술로 울분을 풀다가 과음으로 인한 속쓰림을 달래기 위해 위장약을 먹는다는 것이 잘못하여 일회용 샴푸를 먹고 입에서 비누거품을 계속 뿜어내며 응급실로 실려가는 해프닝을 벌인다. 그 와중에 높이 100미터가 넘는 거대한 쓰나미가 시속 800킬로미터의 무서운 속도로 해운대로 밀려오고 10여 분의 짧은 시간 동안 모든 것이 초토화되어 활기차던 해운대는 무참하게 파괴되고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들 간의 애끓는 사연들을 배우들이 읊조리면서 영화 <해운대>는 마무리 된다.

 

 1980년에 아버지는 서울에서 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귀향했다. 번잡한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바다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해운대 달맞이고개 초입에 있는 별장을 구입했다. 당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나는 해운대 집 이층 내 방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정경이며 동백섬, 멀리 오륙도와 그 곳을 오가는 유람선이 만들어내는 하얀 점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아 틈만 나면 부산으로 향하곤 했다. 그러나 유람선이 운항될 때마다 확성기를 통해 들리는 조용필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거의 고문수준이었고, 여름철 피서객의 숫자가 절정에 이르면 낮은 곳에서 물을 다 빼 쓰는 통에 높은 곳에 위치한 우리 집에선 수돗물이 안 나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한여름은 마당 안 쪽에 자리 잡고 있던 우물의 존재가 더 없이 소중해지는 계절이었다.

해마다 피서철만 되면 우리 집은 멀리 있는 친인척들의 안부전화로 부산스러웠다. 평소엔 소식이 없던 사람들도 오솔길로 5분 만 걸어 내려가면 백사장을 밟을 수 있는 우리 집에서 피서를 즐길 요량으로 연락을 하곤 해서 손님을 선별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고, 새댁이던 올케언니는 가정부와 함께 손님접대 하느라 고생을 해서인지 지금도 해운대 집에 대한 기억은 달갑지 않은 눈치이다. 내 친구들도 돈 안 드는 휴가를 즐기러 우리 집엘 여러 차례 와서 민폐를 끼쳤으니 올케언니의 노역에 나도 한 몫을 한 셈이었다.

 그 집을 처음 만났을 때 정원은 넓은 잔디와 고풍스런 소나무와 향나무, 우람한 호랑이발톱나무 등 푸른 잎들이 무성한 풍경이었는데 해가 갈수록 꽃나무와 유실수, 그리고 낚시를 다니면서 꺾어 온 야생화 등으로 채워지면서 잔디는 점점 줄어들었고 아버지를 닮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시골 꽃밭으로 변해갔다. 뒷마당엔 벽돌을 쌓아 가마솥을 걸어 놓고 여름이면 추어탕을 끓여내고 겨울엔 대구탕을 푸짐하게 만들곤 했다. 집에서 키운 방아 잎이랑 산초열매로 맛을 낸 엄마표 추어탕을 더 이상 맛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서운함이란…

 부모님이 편안하게 만년을 보내며 며느리와 사위들을 맞아들였고 조카들이 뛰어 다니며 만들어내는 귀에 익은 웃음소리와 할머니의 독경소리가 집안을 채우고, 내가 청년기를 거치며 남편을 처음 만났던 그 곳, 해운대는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 모습은 사라졌다.

 옛집이 있던 자리는 소문에 의하면 큰손 장영자 씨가 호화빌라를 짓기 위해 그 일대 땅을 몽땅 매입했는데 자금난으로 부도가 난 후로 아직까지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해 공터로 방치되어 있다.

 물리적인 쓰나미가 아니더라도 세월과 개발의 쓰나미로 인해 해운대는 친근하던 옛 모습은 찾을 길 없고 최첨단과 세계 최고, 최대를 자랑하는 건물들이 국제도시란 허울을 쓰고 해안을 장악하여 달맞이 고갯길 뒤편으로 펼쳐진 장산을 막고 있다.

최근 부산시에선 ‘그린 부산’이란 기치를 내 걸고 도로를 만드느라 끊어진 산림축을 잇고 아파트를 짓느라 파헤쳐져 붉은 속살을 드러낸 산허리를 메우고 물길을 따라 숲을 조성하여 녹색도시를 만든다하니 여간 다행이 아니다.

 부산은 기장 ․ 송정 ․ 해운대에서 광안리 ․ 오륙도 ․ 자갈치 ․ 송도․ 다대포를 지나 을숙도까지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해안선을 가진 도시로, 그 중에서도 해운대는 하와이와 견주어도 꿀리지 않으며 달맞이고개는 몽마르트 언덕만큼이나 정취가 있다.

 내 청춘의 아이콘 해운대의 아름다운 비상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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