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엔 두 가지 대형사고가 있었어. 차 사고와 '디에고' 바로 당신!
20세기 멕시코 미술계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여류화가인 프리다 칼로. 그녀의 불행은 너무 일찍 시작되었다. 유난히 초롱초롱한 눈은 가진 귀여운 소녀였던 그녀는 6세 때 척추성 소아마비에 걸려 9개월 동안 병상에 갇혀 지내게 되고 가늘고 못쓰게 된 오른 쪽 다리로 인해 어둡고 우울한 표정의 소녀로 성장하게 된다.
15세가 된던 1923년, 프리다는 멕시코시티의 최고 명문교육기관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했고 여기서 멕시코 벽화운동의 거장인'디에고 리베라'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디에고는 프리다를 처음 만나던 그날을 다소 과장하며 회상했다.
"그녀는 보기 드문 품위를 지녔고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눈에는 기묘한 불길이 타오르고 가슴은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하여 마치 아이같지 않은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당시 마흔한 살이었고 멕시코에서 가장 유명한 동시에 가장 악명 높은 화가였다.
1925년 9월 17일, 프리다가 열렬히 좋아하던 법학도 알레한드로와 함께 나무로 만든 버스를 탔다. 갑자기 전차가 이들이 탄 버스 옆구리를 들이받았고 버스는 두 동강이 나면서 벽에 처박혔다. 이 사고로 프리다는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야 할 만큼 심한 부상을 입었다. 척추 세 군데와 대퇴골의 경부, 그리고 갈비뼈와 골반뼈가 모두 부서졌다.부러진 전차의 철제 난간이 프리다의 골반을 수평으로 관통했으며 쇠꼬챙이가 왼쪽 골반을 통해서 질을 뚫고 나왔다. 이 사고로 인해 프리다는 일생동안 서른 다섯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고통과 절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를 평생 괴롭혔다.
사고 후 병상에 누워 지내기 시작하면서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그리고 멀어져가는 애인 알레한드로를 붙잡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최초의 자화상을 그려 그에게 보냈지만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림은 그녀의 인생을 버틸 수 있게 하는 버팀목이 되었고이것은 프리다 자신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1929년 8월 21일, 스물 세 살의 프리다와 마흔 두살의 디에고는 코요아칸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프리다의 부모는 그들의 결혼을 "코끼리와 비둘기가 결혼하는 것 같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프리다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이들은 별거와 이혼, 재결합을 거듭했다. 무절제한 디에고의 여성편력은 멈출 줄 몰라 '식인귀'라는 별명처럼 닥치는대로 애정행각을 버려였고 급기야는 프리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도 치명적인 불륜을 저지르자 큰 충격을 받은 프리다는 심한 배신감과 좌절감으로 인해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 사건 이후 프리다는 여러 명의 남. 여 정부를 두고 디에고 못지 않은 욕망을 분출한다. 200여 점에 가까운 그녀의 그림들은 거의가 다 다양한 특징을 갖는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데 짙은 일자 눈썹에 무관심한 눈길, 꼭 다문 입술과 코 밑의 잔수염들이 정성스럽게 그려진 공통점을 볼 수 있다. 이는 여성적이면서도 매우 남성적으로 보이는데 그녀의 양성애적 성향을 드러내놓고 싶은 욕구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1935년 프리다는 매력적인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와 은밀한 외도를 즐겼다. 노구치는 자신을 사랑하면 디에고에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프리다의 경고를 무시하고 겁없이 프리다를 사랑했던 남자다. 이들의 애정행각은 디에고의 극심한 질투를 받고 그 막을 내린다.
1936년 프리다와 디에고는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와 그의 아내 나탈리아의 망명을 돕는다. 이때 프리다는 디에고와 정반대의 성품을 지닌 레온 트로츠키와도 사랑에 빠진다.
1938년에는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수필가인 앙드레 브루통 부부가 프리다의 집에서 몇 달을 머물면서 브루통은 프리다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고 화가였던 그의 아내 자클린과 프리다는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보다 더 철저하게 여정적인 예술은 없다. 최대한의 유혹을 위해서라면 극단적인 순수함과 사악함 사이를 기꺼이 오간다.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폭탄에 두른 리본이다." 라고 앙드레 브르통은 그녀의 작품을 설명했다.
초현실주의 화가 칸딘스키는 프리다의 그림에 감동한 나머지 모두가 지켜보는 전시장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안아 올려 두 뺨과 이마에 키스했다.
까다로운 피카소조차도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떠나는 날까지 그녀의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프리다의 예술에 무한한 찬사를 보냈다.
프리다 칼로는 미국인 사진 작가인 니콜라스 머레이, 미술 딜러인 하인즈 등과 짧은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녀의 사랑은 늘 디에고 리베라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바람보다 자유롭게, 불꽃보다 뜨겁게
1944년경부터 건강이 악화되면서 프리다는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10여 년간 계속된 일기는 그녀가 죽기 전날, 마지막 장에 이렇게 씌여 있었다.
"I hope the leaving is joyful and never to return."
프리다 칼로는 정확히 47년 7일을 살고 1954년 7월 13일 어두운 새벽녘에 바람보다 자유롭게, 불꽃보다 뜨겁게 살아온 생을 마감한다.
부러진 척추 프리다와 디에고
월간 <에세이플러스> 2008년 9월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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